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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근현대 중국철학, 홍수전 손문 모택동 시진핑

근현대 중국철학, 홍수전 손문 모택동 시진핑
  • 저자탁양현
  • 출판사e퍼플
  • 출판년2019-09-01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9-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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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近現代 中國哲學思想은 무엇인가







    1. 中國을 알아야 韓國이 산다



    近代에 이르도록, 中國哲學은 크게 3개의 기둥으로서 구성되어 있었다. 흔히 儒佛道라고 지칭되는데, 儒家, 佛家, 道家는, 중국은 물론 漢字文化圈 國家인 韓國이나 日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朝鮮王朝는 철저히 儒家哲學에 의해 主導되는 사회였다.

    근대 이후 중국은 社會主義 國家가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마르크스主義와 마오쩌둥主義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에도 중국은 名實相符한 共産主義 國家이다.

    淸나라 멸망 이후, 중국에는 마땅한 철학사상이 不在하다. 동아시아 漢字文化圈을 先導하던 中國哲學思想史를 思慮한다면, 다소 안타까운 노릇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자연스런 역사의 흐름이다.

    근현대를 지나면서, 중국을 主導하는 철학사상은 말할 나위 없이 마르크스주의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사 안에서, 이미 실패한 哲學思想이다.

    그러한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중국은 자본주의적 개혁개방을 실행하였지만,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으로 인해,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資本主義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마르크스주의보다는 資本主義가 人間本性에 좀 더 符合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니 인류는 社會主義나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사상을 摸索해야 한다. 현재에도 자본주의는 散在하여 解決해야 할 문제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상황에서, 友邦에 대한 選別이 요구된다. 國際政治의 場에서 覇權國이 아니라면, 양다리를 걸치는 식의 國際關係는 不可하다. 반드시 어느 한 陣營을 선택하여 편가름해야만 한다.

    국제정치는 영원한 敵도 영원한 同志도 없는 법이다. 그래서 자기 편은 늘 流動的이다. 국제정치에서 ‘隣接國의 悲劇’ 관점에서 볼 때, 중국과 일본은 아주 결정적인 事例다.

    중국이든 일본이든 徹天之怨?인 국가들이다. 근현대사를 살필 때, 일본은 壬辰倭亂이나 日帝强占의 역사로써 철천지원수다. 중국은 저 먼 古代로부터 무수한 侵略戰爭을 恣行했고, 조선왕조를 屬國으로 삼았으며, 다시 6.25전쟁으로써 침략을 해왔으므로 철천지원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보니, 두 隣接國에 대해, 이제는 어느 나라가 대한민국의 友邦國家인가를 판가름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였다.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自由民主主義 진영에 설 것인가, 중국과 북한을 중심으로 하는 共産社會主義 진영에 설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複合的인 情況을 思慮해야겠지만, 선택에 대해 적잖은 指針과 尺度를 제공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현재 ‘문재인 정권’에서 떵떵거리며 勢道를 휘두르는 ‘曺國’은, 現職 서울대 敎授로서 休職한 상태이다. 그런데 그야말로 ‘철밥통’인 교수자리가 위태해지자, 슬그머니 復職을 했다가 다시 휴직하면서, 교수자리를 保傳하고 있다.

    과거에 그는, 敎授와 政治人을 병행해서는 안 된다면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그런데 ‘내로남불’ 식으로, 제 밥그릇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실로 그런 것이 빨갱이 從北主義者들의 良心의 眞面目이다.

    주둥이로는 革命, 解放, 民族, 平等, 平和, 人權, 分配, 正義, 正常, 理性 따위를 떠들어대며 ‘개돼지 群衆’을 선동하면서, 정작 제 욕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이 빨갱이들의 本性이며, 나아가 인간존재의 본성이다.

    積弊淸算을 외치며 執權을 한 빨갱이 左派들은, 집권 이후 제 몫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인류의 역사는 늘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개혁세력의 집권은 不可하다는 것이다. 막상 권력을 얻게 되면, 금세 인간존재들의 野鄙한 本性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빨갱이 左派들 首腦部 대부분이, 富者이며 資本家라는 아이러니는, 쉬이 解明된다. 북한의 이너써클 1%만이 好衣好食하는 것처럼, 남한의 빨갱이들도 나름대로 이름깨나 날리면, 죄다 자본가 흉내를 내는 것이다. 그런 빨갱이 族屬 대부분이, 자기 子息들은 어떻게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지 않는가.

    그러니 欲望과 慾心에 솔직한 資本主義體制가 좀 더 그럴듯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속내를 알지 못하는 ‘개돼지 군중’들만이, 그저 그들이 떠들어대는 虛無孟浪한 프로파간다에 놀아날 따름이다.

    그렇다면 保守右派라는 者들은 또 어떠한가. 오죽 제 욕심을 채우며 不正腐敗를 일삼았으면, 현직 대통령이 彈劾당하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겠는가. 그야말로 五十步百步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이러한 左右 進退兩難 속에서, 隣接强大國들의 四面楚歌에 휩싸여 바람잘 날이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의 인접강대국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외면한다면 朝鮮王朝 末期처럼, 그레이트 게임의 혼돈 속에서 나라를 팔아먹고 빼앗기는 難局에 처하고 말 것이다.

    政治는 인간존재의 삶의 根幹이다. 인간존재의 삶 그 자체를 運用하는 天地自然의 원리가, 현실세계에서 顯現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한 정치를 살핌에 있어, 흔히 國內政治와 國際政治를 가름한다.

    그런데 대체로 국내정치에 좀 더 관심을 갖기 십상이다. 아무래도 자기의 삶의 時空間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탓이다.

    하지만 어떠한 국내정치일지라도, 결국은 국제정치의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거대한 프레임 안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적 사례로써 쉬이 검증된다.

    제아무리 국내정치적으로 執權하였더라도 국제정치의 外患이 발생하면, 그에 따를 수밖에 없다. 韓國戰爭으로부터 日帝强占이나 丙子胡亂 등, 그 사례는 굳이 열거할 바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도 左派와 右派의 대립이 尖銳하다. 그러한 현상을 국내정치적 관점에서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과거는 물론이며 현대에서는 어떠한 국내정치적 현상도, 그 動力이 국제정치의 時流에 의하는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현실세계의 어떠한 정치적 현상도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利益과 戰爭’의 관점에서 판단한다는 것이다.

    국제정치의 ‘그레이트 게임’은, 古代로부터 掠奪, 征服, 植民, 冷戰, 覇權 등의 형태로 변화되어 왔다.

    그런데 그것이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 그 裏面에서 작동하는 근원적 작동원리는 ‘利益과 戰爭’이었다.

    나아가 이러한 국제정치적 관점의 根底에는, 歷史가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역사가 바탕이 될 때, 국제정치적 판단은 正統性과 正當性을 획득할 수 있다. 여기서 그러한 역사가 ‘自國에 이익이 되는 역사’여야 함은 明若觀火다.

    그리고 마땅한 정통성이나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역사를 歪曲하게 된다. 그런데 왜곡할 만한 역사조차 없는 경우에는, 이제 온갖 道德主義的 名分을 내세운다.

    예컨대, 21세기에는 人權이라는 명분만큼 그럴듯한 명분은 없다. 물론 인권은 참으로 소중한 보편적 가치 개념이지만, 이렇게 한갓 명분으로써 악용되는 도덕은, Nietzsche가 비판한 ‘奴隷道德’ 部類쯤으로나 분별될 따름이다.

    저 먼 古代로부터 國家의 구성원으로서 살아내는 인간존재의 삶은, 아무리 微細한 상황일지라도 국제정치의 거대한 흐름에 의한다.

    마치 ‘Butterfly effect’처럼,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날씨 변화를 일으키듯이, 미세한 변화나 작은 사건이 추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세상 理致다.

    그러니 한 인간존재의 미세한 행위가, 거대한 국제정치적 사건으로 飛火될 수 있음도 유념해야 한다.

    필자는 그러한 국제정치의 作動原理를 여실히 보여주는 현대적 사건으로서, 에너지 戰場인 一帶一路를 제시한다.

    흔히 一帶一路를, ‘시진핑’이라는 중국의 현대판 皇帝 個人이 도출해 낸 執權政策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一帶一路의 中國夢은, 결코 ‘시진핑’ 개인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 夢想은 중국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그리고 세계 전체를 搖動케 하고 있는 탓이다. 따라서 이를 살핌으로써, 현대의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 역시 赤裸裸하게 분석할 수 있다.

    美中 貿易戰爭이 시작된 직접적인 원인도 一帶一路이며, 北韓의 핵무기와 무역제제에 관련된 문제들 역시, 一帶一路와 첨예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21세기 대한민국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이슈로서, 一帶一路는 가장 時宜適切하다고 할 것이다.

    현대의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主唱하는 것은, 모름지기 中國夢이다. 과연 중국이 꿈꾸는 ‘중국의 꿈’은 실현될 것인가.

    그런데 中國夢이 실현되든 실현되지 안든,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죄다 불안스럽고 불편하다는 점을 인식케 된다.

    특히 一帶一路 式의 中國夢이 실현되었을 때, 그것은 대한민국에게는 惡夢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는, 역사적 사례로써 익히 검증된다. 동아시아에서 중국대륙이 강력한 帝國으로서 정립되었을 때, 인접해 있는 만주대륙과 한반도는 늘 정복의 一順位였다. 그래야만 名實相符한 天子의 제국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一帶一路 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장기적인 인프라 프로젝트는, 그 계획대로만 실현된다면, 경제적인 측면에서 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현재 100여 개 국가 및 국제기구가 참여하고 있으며, 30여 연선국가와 일대일로 공동 건설 관련 협약을 맺었다. 2017년 5월, ‘2017 일대일로 국제협력 고위급 포럼’에서는, 총 270여 개의 가시적인 성과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세계의 覇權國 미국은, 이러한 계획을 坐視할 수 없다. 그랬다가는 자칫 覇權을 중국에게 넘겨야 할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과거에 소련이나 일본을 坐礁시켰듯이, 중국과의 무역전쟁을 벌이며 중국의 몰락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니 현대에 이르러서도, 지정학적으로 부득이하여 배척될 수 없는 중국이, 다시 中國夢을 꿈꾸기 시작한다는 일은, 대한민국으로서는 여러 이유로 인해, 당최 불안한 미래에 대해 銳意注視해야만 하는 사안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중국이 모색하는 中國夢은, 과거 주변국들을 君臣關係로써 屈從시키던 짓을 꿈꾸는 것일까.

    현대적인 自由民主主義 체제문화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서, 과거 獨尊儒術하던 儒敎文化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식의 재현을 꿈꾸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상적, 종교적인 온갖 것들을 죄다 獨裁하던 天子의 帝國을 부활시키려는 것일까.

    그래서 그러한 과정에 걸림돌이라 인식했던 檀君朝鮮, 高句麗, 高麗, 渤海, 統一新羅, 朝鮮 등의 경우처럼, 주변국들이 자기들의 中國夢體制에 순응하고 굴종할 때까지, 침략과 정복을 자행하겠다는 것인가.

    이러하니 가장 근접해 있는 국가 중의 하나인 대한민국으로서는, 도무지 불안과 공포를 숨길 수 없다.

    그러다보니 중국 자본을 受惠하는 親中主義者들도 多數 발생하는 상황이며, 그러한 자들은 과거 大東亞共營圈을 主唱하던 日本帝國을 좇아, 韓日合邦(庚戌國恥)을 주도했던 親日派들과 유사하게, 中國夢의 실현에 어떻게든 기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를 存續시키는 체제이론이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라는 점이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그것을 견고히 유지할 때, 다소 나아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현상유지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是認해야만 한다.

    이는,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生存의 利得’을 위한 不得已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解體하고서, 보다 나은 사회를 정립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면, 응당 그것을 추구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현재 暗?的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人民民主主義, 社會主義, 共産主義, 主體思想 따위가, 과연 그러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만 주의할 대목은, 人情的으로나 人道的으로 北韓의 同胞들에게 한 겨레로서의 민족적 共通感을 갖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國際社會라는 弱肉强食의 현장에서, 그러한 感性的 판단이 시의적절한 대안으로서 작동한 역사적 사례는 거의 不在함을 유념해야 한다.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로서 국제정치적 관점을 갖게 되면, 적잖은 인생의 의문이 해소된다.

    혁명의 상황으로까지 치닫는 근원적인 사회문제들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가질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현실세계의 온갖 不合理와 갖은 不條理에 대해서도 理解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할 때, 인간존재는 외부의 바람에 煽動당하지 않으며, 오롯한 자기의 삶에 충실할 수도 있게 된다. 世間의 인간존재들이 그토록 갈구하는 행복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이 순간, 자기에게 찾아든 苦難의 원인을 명확히 알게 된다면, 그것에 대해서 나름의 대안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近代 이전에는 국제정치적 관점을 제공하는 것이, 위대한 先知者로서 숭앙되는 인물들의 텍스트였다.

    예컨대, 老子, 論語, 大藏經, Bible, Quran, 그리스哲學書 등이 그러하다. 그런 先覺者들의 텍스트를 공부하면, 현실세계라는 ‘우물 안 개구리’ 상태를 극복하고서, 天地自然이라는 거대한 그림을 살필 수 있게 된다.

    곧 天地自然의 ‘그레이트 게임’을 인식하게 되는 탓이다. 그래서 그들의 著作이 현재까지도 인류의 古典으로서 숭앙받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직접적으로 天地自然의 상황을 살피는 시대이다. 예컨대, NASA에서 운영하는 인공위성 화면은 실시간으로 地球라는 行星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지구촌 전체를 살필 수 있는 관점을 지니지 못한다면, 각 개인의 삶의 문제 역시 마땅한 해답을 갖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미세한 상황일지라도 그 결정적인 원인은, 결국 거대한 ‘그레이트 게임’에 의한 逆나비효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제정치적 관점의 培養과 思慮는 실로 중요한 삶의 태도라고 할 것이다.

    제아무리 小乘的 깨달음을 얻어 解脫한다고 해도, 결국 현실세계에서 생존하는 한, 거대한 ‘그레이트 게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은 실로 不得已다.

    이러한 본래적 사실을 是認하지 않는다면, 결코 삶의 現象은 죽음의 순간까지 나아지지 못한다.

    ‘中國哲學(Chinese philosophies)’ 중국에서 전개된 철학사상을 가리킨다. 중국철학은 主流思想의 변천에 따라, 대체로 다음과 같은 7단계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百家爭鳴時期(기원전550~기원전110), 文獻經學時期(기원전110~기원후220), 老莊學·玄學時期(220~404), 佛敎主流時期(405~819), 新儒學·性理學時期(820~1644), 實學考證學時期(1645~1911), 社會主義·全體主義時期(1912~현재)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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