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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15세기 신숙주의 일본 여행기, 해동제국기

15세기 신숙주의 일본 여행기, 해동제국기
  • 저자신숙주
  • 출판사e퍼플
  • 출판년2018-09-09
  • 공급사(주)북큐브네트웍스 (2019-02-13)
  • 지원단말기PC/스마트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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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세기 申叔舟의 일본여행기







    지금껏 필자는 10여 차례 일본의 각지를 여행했다. 횟수나 기간으로 따지자면, 중국 다음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여행한 국가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일본에 대한 필자의 관점이 적잖이 변화되었고, 현재에도 여전히 변화 중에 있다.

    地政學的으로 韓中日 3국은, 예컨대 히말라야 산맥이 대륙 간의 충돌에 의해 솟아오르는 식의 거대한 격변이 도래하지 않는 한, 결코 변할 수 없는 위치에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3국의 國籍人들이 모여 결성된 ‘트와이스(TWICE)’라는 걸그룹을 볼 때면, 결코 지정학적으로 離隔될 수 없는 한중일 3국의 상황을 연상하곤 한다.

    물론 ‘트와이스’는 한국, 일본, 대만 등의 국적인으로서 인간존재들의 모임이므로, 여러 이유로 離合集散될 수 있다. 다만 ‘원스’의 한 사람으로서, ‘트와이스’가 당최 변할 수 없는 3국의 지정학적인 配置처럼, 아주 오래도록 ‘나정모사지미다채쯔’ 9명 모두가 함께 하면서 활동해 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유년시절의 필자에게 일본은, 公的 역사교육을 좇아, 조선왕조를 몰락시키고서 식민지로 삼았던 강도나 도둑 같은 이미지의 제국주의적 국가공동체였다.

    그런데 실상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 역사 안에서 일본은, 식민주의적 팽창주의를 강행하는 강대국이라기보다는, 늘 후진적이며 빈곤한 역사와 문화를 지닌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과정 동안에는 응당 일본이라는 통일된 형태의 국가공동체는 실재하지 않았다. 그저 변방의 오랑캐나 해적 집단으로서 倭寇쯤으로 인식될 따름이었다.

    일본이라는 통일된 국가 형태의 공동체가, 오랜 戰國時代를 마감하고 동아시아 역사에 실제적으로 등장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서이다.

    1590년 8월 ‘오다와라(小田原)’ 城이 끝내 항복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치적인 의미에서 일본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기는 申叔舟가 王命에 따라 1471년에 일본을 여행한 이후, 10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한때는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숭이’라는 깔보는 듯한 별명으로 불렸던 농민 보병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뒤를 이었을 뿐 아니라, 1582년 주군이 암살당하며 미완으로 남긴 일본 통일이라는 과제를 이룩했다.

    앞서 ‘히데요시’는 거의 모든 ‘다이묘’를 상대로 연이어 신속한 전투를 벌여 자신의 封臣으로 삼은 바 있다. ‘쇼군’이라는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는 천황의 축복을 받아 실질적인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본토 북쪽의 영주들은 여전히 위협의 대상이었다. ‘호조’ 일족이 계속해서 ‘히데요시’를 비천한 신하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1590년까지 ‘교토’에서 입지를 확고히 다지며 기회를 보다가, ‘호조’ 일족의 요새화된 城인 ‘오다와라’ 공격을 감행했다. 10만 명 이상의 엄청난 군대가 성을 포위했다. ‘히데요시’는 전면 공격을 개시하지 않고, 적군의 식량이 부족해질 때까지 기다려 복종을 받아내었으므로, 실제로 전투는 거의 없었다.

    항복을 기다리는 동안, 군사들을 위해 매춘부며 가수를 부르고, 서커스 같은 공연을 열어 여흥을 벌여, 포위전은 마치 시장 같은 광경이었다고 한다.

    이후 ‘히데요시’는 중국 공격의 관문으로서 조선 땅을 확보하기 위해 壬辰倭亂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궁지에 빠진다. 이 일로 ‘히데요시’는 신경쇠약까지 겪었다고 한다.

    한때는 능란한 무장이었지만, 조선의 자연환경과 해군력, 아직 남아 있던 명나라 세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강력한 무신들 손에 나약한 아들 하나를 남기고 죽었으며, 그의 업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 번째로 일본 대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발판이 된다.



    1603년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쇼군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1868년까지 일본을 다스리는 ‘도쿠가와 막부’가 수립된다. 그런데 그가 실질적 통치자로서 ‘쇼군’이 되기까지는 실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본 列島의 동쪽 ‘혼슈’ 지방에서 작은 씨족의 영주로 태어난 ‘이에야스’는, 1568년 일본을 통일하기 시작한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군으로서 세력을 얻는다. 1568년 ‘노부나가’가 죽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뒤를 이었고,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그에게 반대했으나, 1584년 입장을 바꿔 그의 편에 붙었다.

    1590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함께 일본에 마지막으로 남은 독립 영주인 ‘호조 우지마사’를 정벌한다. ‘히데요시’는 중부 가까이 위치한 ‘이에야스’ 가문 소유의 영지를 받는 대신, 그에게 ‘호조’ 가문 영지를 내려 주었다.

    이후 ‘도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성곽 도시 ‘에도’에 자리를 잡은 ‘이에야스’는 경제 개혁을 통해 지역 주민의 충성심을 얻었으며, ‘에도’가 ‘교토’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1598년 사망하기 직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지목하여 어린 아들 ‘히데요리’를 대신하는 섭정 의회의 우두머리를 맡겼다. 그런데 1599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거주하는 ‘오사카 城’을 점령하여 섭정 의회를 분열하고 내전을 일으킨다.

    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정적들을 확실히 제거하여 누구도 대적할 바 없는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다. 40년간 비어 있던 ‘쇼군’ 자리에 ‘이에야스’가 임명된 것은, 그가 오래 전부터 쥐고 있던 권력에 대한 최종 승인이자 합법적인 인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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