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에서 돌아오는 무궁화 열차 안에서 나는 허름한 차림의 한 사내를 만난다. 간식으로 챙긴 술과 안주를 얻어먹고 담배까지 요구하더니 맞은편에 앉은 제니와 앤, 미국 사촌들을 보고 보답이라며 마술을 보여준다. 손목에서 장미를 꺼내고 입에서 붉은 천을 뱉는 남자. 잠시 후 환호에 답하며 ‘마술이 아니라 진짜’라고 말한다.
잠시 멈췄다 다시 출발하는 열차. 그 안에는 사람이 있다. 한시가 바쁜 출근길, 나는 계단 가장자리에 ‘죽은 듯 멈추어 선’ 남자를 본다. 나는 죽음의 바다(死海)의 바위 요새 마사다를 떠올리고, 남자는 열차가 다가오는 선로에 누워 눈을 감는다. 어두운 터널 저편에서 오는 탁한 바람이 열차인지 적군인지 모른 채.
이단은 지난 2월 12일 계단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졌다. 전치 6주의 진단, 공교롭게도 가문회의가 있는 날. 결국 회의는 가지 못하고 그로부터 한 달 넘게 입원하게 된다. 열흘 만에 찾아온 첫 문병객이자 먼 친척 piq는 이단의 회의불참에 원로들이 언짢아한다고 전하며, 파문 대상에 이단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는데.
지난 밤 아빠가 종이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상자 안에는 바로 38구경 시큐리티 식스,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총이 들어 있었다. “뽀다구”나는 리볼버를 들고 아빠는 며칠 전 집에 도둑이 들었던 일을 떠올린다. “중요한 것은 늘 이 녀석을 품에 지닌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며.